잘못된 죄 자백

 

제가 장로님을 만나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습니다

 

오래전에 대구에 사는 어느 집사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는 경상북도 작은 소도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여자 집사인데 오래전에 훈련을 받았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학교에서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유부남 교사와 간음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기르면서 남모르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전도훈련을 받고 남편에게 어렵사리 그 죄를 자백했다. 그의 남편은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날마다 더럽다며 그를 구박을 하곤 했으며 침대에서 발로 차서 떨어뜨리는 일도 하면서 아내를 미워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아픔으로 결말이 났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기 위함이다. 죄를 고백해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죄의 고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 열매가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죄의 고백은 반드시 주안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귀의 훼방함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항상 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하는 죄자백은 그렇지 않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가해자로 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마귀에게 당한 피해자로 보고 불쌍히 여기고 주님이 용서해주심과 같이 용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 못지 크고 많은 죄가 있음을 깨닫고 피차에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그 집사는 오랜 세월동안 시달려 온 자기의 내면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죄자백을 이용한 것이다. 죄자백을 도구로 하여 자기의 죄를 남편에게 죄를 자백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하여 죄를 자백한 것이다. 그것을 그의 남편이 진실하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여 진 것이 아니요 미련한 일이고 육신적인 일이며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 이와같은 일이 많이 일어난 것은 그만큼 마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역사하녀 믿는 이들을 꼬꾸라 뜨리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이 나는 일이 있다. 어느 권사가 장로인 자기 남편에게 죄를 자백했다. 그 권사는 대학을 다닐 때에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학비를 조달하기가 힘들게 되자 골프장의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기서 만난 사회적인 유명 인사들로부터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죄를 많이 지었다고 했다. 이분도 전도훈련을 받고 회개하면서 돌아가서 자기의 남편에게 죄를 자백을 했는데 그 남편은 장로지만 자기 아내의 죄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무릎을 꿇리고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칼을 사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처단을 할까 하며 이를 갈고 다녔다고 한다. 그 남편은 그 후로도 여러 집회에 여러번 모습을 나타내어 말씀을 듣고 괴로워 하면서도 끝내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서로를 포기하다시피하고 때마침 찾아온 가정의 경제적인 위기에 재산을 다 날리고 각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느라 피차에 그와 같은 일을 서로 거론할 힘도 없이 그냥 교회를 다니면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은 케이스도 그 아내 되는 권사가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떨어내는 수단으로 죄 자백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며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와같은 마귀의 역사로 깨어진 가정이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가정만이 아니다. 교회도 깨진적이 적지 않이 있다. 그것은 믿음도 아니요 진리도 아닌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 간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를 하는 것이나 죄를 자백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전적인 역사로 되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죄를 깨닫는 것도 죄인은 스스로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회개를 하는 것도 인간사회 곧 죄인들에게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기 3장에서 보듯이 죄를 지은 인간은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고 그 결과와 책임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죄인이 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그의 아들에게 전가시키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요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죄인이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전가시키신 사실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놀라운 은혜요 특권인 것이다. 그것은 두려운 것도 아니요 무서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용서함을 받은 확신과 마음의 평안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의 죄인들은 죄를 가지고 죄를 지었느냐 아니 지었느냐를 따지고 왈가왈부한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살며 한도 끝도 없이 흑암속에 갇혀서 자신이 죄인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 죄를 왜 짓는 지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저주를 살게 된 것도 알지 못하고 죄의 결과로 사람사이에서 고통을 주고 받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죄로 고생을 하면서 살지만 죄의 문제는 애써 외면하고 돈이나 사람이나 다른 문제들만을 문제시하고 다른 것들을 중시하면서 정작 알아야 하는 자기 자신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인생을 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 난 것이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 난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상태로 태어 난 것은 그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이다.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의 영혼이 죽고 육체만 살아서 모태로부터 나온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생명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 육체도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여 죄인이 된 것이다.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죄를 그의 아들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저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이는 다시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이 영생을 얻은 자들의 비밀이다. 육으로만 난 죄인이 이제는 영으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들의 죄만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생활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는 생활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생활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아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죄가운데서 살던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질병의 문제, 소위 먹고 사는 문제인 경제문제, 가정문제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문제들이 다 해결된 것이 십자가의 주님의 수고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이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신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은혜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 하신 것이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기 좋아서 하신 말이 아니다. 진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의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죄를 짓고 그릇 갈 때마다 잘못된 것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은혜이다. 지은 죄 하나 하나 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는 것이 은혜이다.

 

그래서 죄자백은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로 죄를 깨닫게 하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은 사실에 대한 확신과 기쁨을 가진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은 죄를 피해 당사자에게 고백을 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은 확신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한 죄를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자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죄를 사람에게 용서를 받음으로 마음의 죄책감을 지우려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회개이다. 그것은 단지 죄자백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이용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인들이하는 죄자백이 아니라 세상이 하는 것이요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하는 죄자백이고 구원을 받지 못한 죄인들이 하는 죄 자백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외인들이 하는 죄자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 언급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과 같은 파멸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가 원하는 일들이다.

가정이 깨지는 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이며 마귀의 역사로 나타나는 일이다.

성령으로 하는 죄자백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수반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이다. 성령으로 죄를 자백할 때에 이와같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서 주안에 있는 자들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상대방의 죄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하고 울어 주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역사하는 죄자백은 반드시 가정을 회복시킨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죄자백은 인간관계를 회복시킨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죄자백은 반드시 교회를 회복시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죄자백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온 것이 단 한건도 없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의 역사로 죄자백이 있을 때마다 가정이 회복되는 일이 무수히 일어났다. 성령으로 죄를 자백할 때마다 교회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인간관계도 회복이 되었다. 성령으로 죄를 자백할 때에 목사다운 목사가 되는 일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성령으로 죄를 자백할 때에 장로가 장로가 되는 은혜도 많이 있었다. 성령으로 죄를 자백할 때에 모든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되는 것을 우리는 맣니 보았다.

나중에 우리가 다 주님앞에 섰을 때에 성령의 역사로 죄자백을 함으로 가정이 회복된 사람들은 손을 들라고 하면 거의 모든 성도들이 손을 들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죄를 용서 해주고 용서를 받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다. 죄인이 의인이 되어서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의인이 되었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다. 죄를 아니 짓는 것처럼 외식하는 자들은 교회안에 있으나 주님이 계신 교회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다닐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생활은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안에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교회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새 교회는 죄가 없는 교회, 회개가 필요없는 교회가 된지가 오래 되었으며 피차에 죄를 자백하는 것이 생소하기 조차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교회안에 예수가 없는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의인이 되었어도 날마다 짓는 일상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솔로몬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아니 짓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왕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래서 주님은 교회의 정의를 두 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인곳에 함께 하시는 곳이라고 말씀을 하시고나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을 받고 제자들에게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를 해줄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주님은 곧 이어서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들어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다.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형제는 일백데나리온 빚을 진 자이다.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우리는 일만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이다. 한달란트는 20년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이다. 그러면 일만달란트는 20만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다시 말하자면 평생에 벌어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죄의 빚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빚을 하나님의 은혜로 탕감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는 의인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악하고 반역한 죄인이라도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진자들이라면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는 것이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죄인을 주님은 하는 것이 오히려 악한 종이 되는 것이다.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러므로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과거의 죄인들 곧 오늘의 의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관용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형제를 너그러움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죄자백은 반드시 화평의 열매를 맺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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