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빈장로

1장 확신이 없는 교회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오늘날의 교회는 확신이 없는 교회이다. 길에서 만나는 많은 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다. 술냄새를 풍기고 역한 담배냄새가 나는데도 "저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 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부르는 찬송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신이 없으며 기도응답의 확신이 없다. 세상에서 오늘도 내가 믿음으로 살아서 승리한다는 승리의 확신은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형편이다.

어느 목회자가 오늘 우리교인들이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시장에서 길거리에서 마귀와 잘 싸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교회에 잘 나오기만 하면 봉사를 조금 열심히 하기만 하고 헌금을 잘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시대인데 교인들 중에 누구누구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전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몇이나 되겠는가?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은 사람이 전무하다는 말을 들어도 항변할 수 없는 실정임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예수 재림의 확신이 없는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이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재림을 말하는 것이 타부가 되고 휴거를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으며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자신이 없는 교회가 되었다. 교인들은 물론이요 교회조차도 세상의 물질가치에 현혹이 되어 내세의 영원한 소망을 잊어버림으로 세속화의 흙탕물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넘실거리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2장 영광과 능력과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예배당 건축물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나타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나 교인들의 삶 속에 있지 아니하다.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세속화 되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힘도 없어진지가 오래다. 하나님의 이름이 육신적이고 종교적이며 세상적인 교인들에 의해 하루종일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모독함을 입고 있다. 저들은 걸어 다니는 홍보물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악선전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죄인들에게 까지 욕을 먹고 짓밟히는 일들이 흔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있다. 누가 세속화된 교회의 말을 듣고 회심을 하겠는가?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이 쓸데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쓸데없어져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교회의 모습이 역력하지 않은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늘도 세상이 교회를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조차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닌가? 죄를 이기는 능력을 상실했다. 마귀를 이기는 능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 환경을 이기는 능력을 다 상실했다. 교인들의 능력을 측정할 수도 없고 측정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교회 안에 출석을 잘하고 봉사 잘하고 헌금만 잘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아예 믿어버리는 소경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이 나라의 교회가 왜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했는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권능이 왜 나타나지를 않는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주님을 닮은 인격이 교회 안에 희귀하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일상의 사소한 죄 때문에 원통해하고 분히 여기며 회개하는 심령들이 교회 안에 없다. 교인들의 입술에 거룩함이 없고 세상이야기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오고가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사람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인격이 없다. 교인들이 닮을 수 있는 거룩한 인격이 교회 안에 거의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 곧 교회 안에서는 경건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가정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주님을 보여주는 거룩함을 상실한 채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수다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고사하고 세상사람들의 도덕적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가련한 교회가 되었다.  


3장 복음이 없는 교회

어느 목사님에게 십자가를 설교해야 한다고 말을 했더니 그분은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을 했다. "목사님 설교하다가 십자가를 한번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를 말하는 설교를 말하는 것 이지요" 그 목사님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마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오늘의 교회는 복음이 없는 교회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중심의 설교가 없다. 어떤 이들은 "그러면 너희만 복음이 있다는 말이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항의는 항의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설교의 처음과 중간과 끝이 십자가를 입증하고 십자가를 증명하는 설교가 없다. 교인들의 심령을 그리스도의 피로 흡족하게 적셔주는 설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십자가의 눈물이 강수와 같이 흐르는 장면은 이제는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음을 십자가의 눈물이 있는 예배를 드려 보았던 교회 안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다 알고 있다.

예배 때마다 복음설교를 듣고 회개를 하는 모습도 희귀한 교회가 되었으며 말씀을 듣다가 또는 찬송을 부르다가 때로는 기도 중에 심령을 깨뜨리는 회개를 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들이 생소한 교회가 되었다.

복음의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인격이 사라졌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강단에서 조차도 때마다 십자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인격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 밖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지옥의 멸망 길을 가고 있는 영혼들에게 들려줄 복음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죄인들에게 줄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흥사들의 메시지에 복음이 사라진지가 오래됨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고 세상말과 농담, 그리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들과 근거도 없는 축복을 남발하는 무서운 일을 아무 감각이 없이 행하고 있다. 저들 중에는 자기가 부흥사인지 삼류코미디언인지도 모르는 저질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교인들이 부흥회를 하면 모이지 않는 이유는 저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심령들을 실망시켜 왔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없다. 복음전도자가 길에서 저자에서 동네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도를 해도 복음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교회 안에 복음전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도자가 연약하기 때문에 전도를 잘 못한다면 오히려 기도해주고 도와주어야 함에도 전도하는 사람들을 비방을 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도지에도 복음이 없다. 교인들의 심령 속에도 복음이 없고 교인들의 생활 속에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의 눈물이 없다. 교인들의 모임에도 복음이 없고 십자가를 상실한 교인들 속에 죄에 대한 아픔도 심각한 회개도 일어나지 않는다.  


4장 모이지 않는 교회

오늘날의 교회는 모이지 않는 교회이다. 부흥회를 열어 놓고 교인들이 모이지 않아 강사에게 죄스러워하는 담임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이지 않는 교인들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집회의 내용이나 성도들이 얼마나 변한 것은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이 교인들이 많이만 모여주면 집회가 성공한 것이라고 믿는 창백한 모습으로 일하는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더욱 힘써야하는데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 풍조가 확산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왜 교인들이 모이지를 않는가? 사모함이 없기 때문이다. 왜 교인들의 심령에 사모함이 없는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흥사들이 복음이 아닌 설교 은혜를 주지 못하는 집회로 오랫동안 심령들에게 실망을 끼친 결과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교인들을 붕 띄워주는 메시지, 눈물이 나도록 웃기기만 하는 집회, 돌아서면 허전한 축복론, 회개의 눈물이 없는 부흥회등이 얼마나 오랫동안 성도들의 심령을 상하게 하였는가? 영적인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교인들의 심령도 거기에 가봐야 공허함만을 안고 돌아온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어찌 모이기를 힘쓰는 집회가 될 수 있겠는가? 예배 때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없이 공허한 심령을 쓰러 안고 앞으로의 한 주간을 승리한다는 확신이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심령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아침에 드린 예배나 저녁에 드린 예배가 다를 것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사는 심령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렇다고 저들의 심령은 바꿀 능력이 없어서 예배의 순서를 바꿈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느낌을 바꿈으로 교인들이 색다르게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현혹을 시키는 인본적인 기술도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모일 때마다 주님을 만나는 모임이 되어야 하고 기도응답을 받는 기도회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는 예배, 주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부흥회 회개가 있는 부흥회가 절실히 필요한 세대가 되었다. 다시는 영혼들을 속이고 우롱할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직하게 전파하고 전파한대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부흥회를 준비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그리고 회중들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강사를 두렵고 떨림으로 초청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사신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망케 하는 장본인이 될까를 두려워해야 한다.


5장 십자가의 눈물이 없는 교회

일전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나서 담임목사님과 다과를 할 때의 일이다. 그 목사님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을 했다.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찬식을 해도 눈물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렇다 당신의 주변을 살펴보고 당신의 교회를 들여다보라 성찬식을 할 때마다 눈물이 있는 성찬식을 하고 있는지를....
사실 옛날에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흐느끼며 성찬식을 하던 한국교회였다. 죄를 아파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감당 못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잔을 받고 떡을 받았던 성찬식을 오래 믿은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눈물이 없는 성찬식을 의식적으로 치루는 교회가 되었다.


6장 영적전투력이 없는 교회

오늘의 교회는 영적전투력을 상실한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교단 안에서 서로 싸우기는 잘해도 마귀와는 싸울 줄을 모르는 교회가 오늘의 교회이다. 마귀를 대적하지 않는다. 마귀에 대한 적개심이 없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세상을 미워 할 줄도 모른다.
교회안에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영적인 전투력을 갖춘 교인들이 얼마나 되는가? 목회자들도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이기지 못하며 마귀를 싸워 이기는 삶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마귀를 이길수 있는 전투력을 갖추고 실전에 배치된 교인들이 얼마나 된다고 믿는가? 날마다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승전보를 접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을 하는가? 아니 교회가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투조직이라고 믿으며 영적전장에서 전투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 땅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교회의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이 괜히 하시지 않은 것임을 우리는 무섭도록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7장 영적실재가 없는 교회

오늘의 교회는 영적실재(靈的實在)가 없는 교회이다.
영적실재라는 말은 생소한말처럼 들릴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단어 중에 하나가 영적실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영적실재가 없다는 말은 믿음의 실효성이 없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가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듯이 실재가 없는 영적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과 함께 살지를 않는다. 교회 일을 해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실재가 없다. 봉사를 해도 하나님과 함께 살지는 않는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일을 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살고 있으며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해도 하나님과는 따로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생활을 공유하는 영적생활이 없다는 말이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배우도다"라는 찬송과 같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을 하며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적감동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사귐이 있는 영적교통의 생활이 없다. 주님과 함께 살고 행하는 대로 주님을 닮아가는 생활이 없다는 말이다. 또 주님과 함께 사는 대로 열매가 맺어져야 함에도 영적성장의 열매가 없는 교회의 모습 주님을 닮아 성장하는 인격의 열매와 복음전도의 열매가 없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과수원의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그러하며 이 땅의 성도들은 더욱 열매를 맺는 실재가 있어야 한다.
결국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대로 한 말씀 한 말씀 순종하여 말씀대로 고집하며 말씀대로 사는 믿음의 실재가 없다는 말이다.


8장 사도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42)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자 사도들은 그들을 가르쳤다. 그것을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사도행전을 공부할 때의 일이다. 위의 말씀에 대해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어느 목사님이 통곡을 하며 울부짖었다. "주님 나에게는 사도의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렇다 오늘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이다.

사도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방금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실제로 주님과 함께 잘 살수 있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굳이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새신자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의 가르침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삼년반 동안 함께 숙식을 하며 사랑하며 본을 보이며 가르치셨던 가르침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른바 지상명령(至上命令)을 하시면서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참 제자라면 주님에게 직접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은 것을 나중 믿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명령(至上命令)은 위로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곧 다른 것은 못해도 이 명령은 주님의 교회가 순종해야하는 주님의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라. 나에게도 옛 제자들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심도(深度)있게 받은 사도의 가르침이 나의 인격과 생활 속에 있는가를 생각하라. 머리와 귀로 주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순종으로 주님을 배운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행실이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상대해주실 수 있는 거룩함의 생활을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주님을 본받고 또 나를 본받음으로 주님을 닮아 가는 제자들이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그리고 주님께 받은 그것을 성도들에게 날마다 가르치는 사도의 가르침이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부터 살피는 것이 교회의 양심이요 목회자의 목회양심이요 교회지도자들의 신앙양심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히 인정을 해야 한다. 나에게 이와 같은 사도의 가르침이 없다고 그리고 교회 안에도 사도의 가르침이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갓 예수를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올바른 영적생활의 지도를 받지 못한 채 교회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어리석음이 두드러지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나 지도자들이 교회적으로는 종교적으로는 잘할지 몰라도 영적으로 갓 태어난 영아들이 영적인 무관심속에 내어버려지고 방임되며 유기(遺棄)되고 있는 무서운 일들이 행해지고 있음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이는 육신적으로 낳은 아이를 버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무서운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저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영적인 걸음마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원수마귀를 대적해 싸울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길리움을 받고 있지 못했으며 지금도 못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다 된 것처럼 가르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전도를 못하는 집사,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지 못하며 성경도 가르치지 못하는 장로들이 교회 안에 수두룩한 현실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부터 영적인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교회안의 성도들의 영적참상(靈的慘狀)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한히 여길 줄 아는 아픈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사도의 가르침을 회복시켜달라고 주님께 전심으로 부르짖어야 한다.


9장 사표(師表)가 없는 교회

오늘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인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 단지 가르치는 지식이나 가르치는 기법이나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데에 있다. 사도의 생활을 사는 인격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 본받을 그리스도의 인격도 찾기 힘이 들고 본을 보이는 주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지금이 경건한 자들이 끊어져 가는 때임을 하나님 앞에 진실한 교회는 알고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뭇성도들에게나 목회자들에게 사표(師表)가 될만한 인격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기독교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세상의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들의 주님을 닮은 인격과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 아니고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수 없는 일이다. 에스라는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오늘의 교회의 비극이 이렇게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인격들을 찾아보기 힘든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 많이 있는데 골방에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 인격과 말씀대로 말을 듣지 않는 자기의 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고 말씀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인격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힘있고 유능한 지도자들은 많이 있어도 존경받는 지도자들은 드물다. 교계에 유명한 지도자들은 많이 있으나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본받고 싶고 닮고 싶은 주님의 인격을 가진 지도자들은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목마름은 말이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사람을 애타게 찾는 데에 있다.

이세상과 세상사람들의 타는 목마름도 목사다운 목사를 보기 원하고 교회다운 교회를 보기 원하고 모든 언행심사에 자기들과는 다른 그리스도를 닮은 교인다운 교인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나라가 살고 하나님의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가 처처에서 일어나야 한다. 바로 당신이 지금 에스라와 동일한 결심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그렇게 살기 시작해야 한다.    


10장 영적계보가 없는 교회

오늘날의 교회는 영적계보(系譜)가 없다. 영적인 사표(師表)가 없는 교회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 예수를 닮았는지 사람을 닮았는지도 모르는 인격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다. 바울과 디모데와 그의 충성된 자들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보가 없다는 말이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을 보지 못하였으나 골로새 교회가 사도적인 교회가 되게 한 것은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성도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골로새교회는 바울과 에바브라로 이어지는 영적계보가 있는 교회요 교인들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항상 바울과의 영적인 끈으로 묶여 있었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입고 그 하나되게 하심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하나가되게 하옵소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렇게 영적인 계보로 실제적인 연결이 이루어지고 성령으로 하나가 된 모습으로 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영적인 계보는 '누구 때문에 교회를 나왔다' '누구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가 아닌 것이다. 지속적으로 영적교통과 수고와 아픔을 같이하는 계통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으로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는 지금도 보지 못한 그들을 위해 애를 쓰고 그들을 세우기 위한 사역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1,2)
우리 주님도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여지없이 책망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입술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의 흉내를 낼 뿐이요 아브라함을 닮고 아브라함과 같이 사는 흔적이 없는 영적인 계보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요한 칼빈을 자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칼빈과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눈을 씻고 주위를 둘러보고 찾아보라. 요한웨슬레를 부르짖으며 가르치고 자기만이 진정한 요한 웨슬레의 후예인 것처럼 부르짖는 사람들 가운데 요한웨슬레의 인격과 거룩함으로 사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가?
교만한 저들은 주님의 말씀을 힘써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
당신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인가?
당신의 영적인 계보는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가? 아브라함과 사도들과 바울 그리고 디모데와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당신을 알아보겠는가?
시편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 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 도다 (셀라)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 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시87:1-7)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교회는 어디로부터 났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라.
오늘날의 교회의 가장 시급한 일은 영적인 계보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11장 영적교제가 없는 교회

오늘의 교회는 영적교제가 없는 교회이다. 일주일에 몇 번씩 교회에 나와서 각자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돌아가는 것이 오늘의 교회이다. 물론 부분적인 영적교제는 미미하게나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활발한 영적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교회의 본질은 영적교제권에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영적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서로 나누고 교제함으로 피차에 세움을 입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의 축복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영적교제권을 명하신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브라함의 할례는 곧 아브라함의 교회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은 우리에게 임한 것은 영적할례이며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영적생활을 공유하는 사람이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과 공유하고 있는 영적생활을 나눔으로 서로 본을 보이고 세워줌으로 각자의 영적생활의 현장에서 영적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하는 영적인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가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동질의 영적생활이 있어야 하며 처음만난 교인들끼리도 영적으로 잘 통하는 것은 각자가 일정기간동안을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 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잘 통하는 것이 영적생활이라면 성도들끼리 영적으로 잘 통하는 것을 영적교제라고 하는 것이다. 성도들끼리 육신적으로는 잘 통하지만 영적으로는 잘 통하지 않는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통하는 영적생활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과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죄와 우상 때문에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가 막힌 것이요 성도들끼리도 잘 통하지 않는 것은 피차에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교만해 지고 정죄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생활이 있으면 성도들과 함께 사는 영적교제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을 도모하는 곳이요 성도들 간에 영적교제를 활발케 하는 것이 교회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교제가 교회의 본질이요 영적교제가 있는 교회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이를 위해 우리구주께서 피 흘려 죽으셨다. 영적교제가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를 무색케 하고 보혈의 값을 에누리하는 무섭고도 더러운 죄에 빠져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12장 회개가 없는 교회

거룩함을 상실한 한국교회는 회개가 없는 교회요 죄를 미워하지 않는 교회이며 죄를 아파할줄 모르는 교회이다. 설교를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교인들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교인들이 죄를 깨닫고 죄를 아파함으로 통회자복하게 하는 일도 안 일어난다.

예배 때마다 심령을 깨뜨리는 회개를 하던 한국교회는 이제 어디로 가버렸는가? 부흥회 때마다 죄에 대한 아픔으로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흐느껴 울던 심령들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 더 드리지 못하고 더 헌신하지 못하고 주님을 더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울부짖던 심령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회하며 자복하던 교회는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강단에 설 때마다 회개를 촉구하던 설교자들과 전도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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