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생각,바른해석
첫사랑을 다시찾는 비결
본문 : 계 2:1-7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1. 들어가는 말
누구든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과의 첫사랑이 있다.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찾아 오셔서 나타내 주시고 나를 만나주신 그 사랑의 순간은 평생에 잊어버릴 수 없는 경험이며 이 땅에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사건이다.
그러나 세상의 첫사랑은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것이지만 주님과의 첫사랑은 그 순간부터 지속되는 생활이다. 주님과의 첫사랑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첫사랑은 기억을 해도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님과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는 생활을 사는 현실이 없으면 그것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나 몰라 라하고 다시 찾지 않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 주님과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다시 찾고자 간절히 원하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고 백방으로 애를 쓰는 것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예외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찾지도 못하고 또한 찾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사랑이 결핍된 믿음으로 오늘도 귀한 세월을 헛되이 보내면서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는 오늘말씀을 통해서 처음 사랑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과 또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의 본질에 문제와 처음사랑을 찾아 주시는 주님의 방법을 깨달음으로 한사람도 남김이 없이 처음 사랑을 다시 찾는 은혜를 받고자 한다.
2. 주님의 명령
먼저 처음 사랑을 다시 찾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중에 가장 먼저 에베소교회에게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책망하신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에베소교회는 주님이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주님의 책망하심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처음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처음행위를 다시 찾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일곱 촛대는 일곱교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신다는 말씀은 교회를 옮기신다는 말씀이요 교회를 옮기신다는 말씀은 곧 교회로 인정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처음사랑이 없는 교회는 절간이나 이방종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종교생활을 사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중에 다른 교회의 모교회로서 가장 오래된 교회요 가장 큰 교회요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교회이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더 이상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책망을 하신다. 그것은 처음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3. 처음행위
처음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은 처음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손을 놓아버린 것이 처음행위였기 때문이다. 에베소교회의 처음행위는 사도행전 19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 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행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행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 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행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4. 처음사랑과 처음행위
주님과의 처음 사랑은 세상사람들간의 첫사랑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첫사랑은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만 그리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이혼을 하고 첫사랑을 했던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같이 사는 분들과 상담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차에 큰 실망과 아픔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추억을 현실로 가지고자하는 인간의 또 하나의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주님과의 처음사랑은 기억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주님안에 거하는 생활로 연결이 된 것이며 그것은 가장 생생한 현실이다.
“너의 처음 사랑”은 “호 아가페 수 호 프로토스”이다. “프로토스”는 “처음” “먼저”라는 뜻도 있지만 “최상의”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처음사랑은 주님과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최고조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고 질문 하셨던 그 사랑을 말한다. “버렸느니라”는 “압히에미”로서 “보내다” “포기하다” 생략하다“라는 듯이다.
처음행위의 “행위”는 “엘곤”으로서 “행위”, “수고” 또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최고의 행위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명하셨던 “내 어린양을 먹이라”와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의 양을 먹이고 주님의 양을 치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행위가 누적이 되면 생활이 되는 것이다. 최고의 행위를 계속하면서 최고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받은바 처음사랑과 처음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사랑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과의 처음사랑은 주님안에 거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5. 구속함의 사랑
처음사랑은 구속함의 사랑이다. 나 같은 죄인을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처음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다. 온전치 못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영적으로 아주 죽은 하나님앞에서 사람구실을 하지 못할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하루살이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사 51: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하루살이 같을 뿐 아니라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하찮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욥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욥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욥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욥 4:21) 장막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사신 하나님이 죽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원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영원하신 재판장이 심판의 대상인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7: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 멸망의 대상인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이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신 사랑이 구속함의 사랑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구속함의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처음사랑 곧 최상의 사랑이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6. 속죄생활
구속함의 사랑이 처음사랑이다. 그러나 속죄생활을 하지 않으면 구속함의 사랑 곧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생활을 피할 수는 없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말씀으로 거룩해 지면서 죄를 이기는 생활을 살게 되지만 날마다 연약함으로 죄를 짓는 생활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왕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이 필요 했던 것은 날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함의 은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처음사랑 곧 구속함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주님안에서는 사랑도 생활이며 행위도 생활이다. 그러나 속죄생활이 없으면 처음사랑의 생활을 잃어버리고 처음사랑의 생활을 보내버리면 그 결과 처음행위의 생활도 손을 놓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에게 가죽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담은 처음 인간이요 처음죄인이며 처음으로 구속함을 받은 처음 의인이다. 구속함을 받은 의인이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아니 지을 수는 없고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가 씻김을 받아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여전히 함께 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속죄생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속죄제사를 드리는 속죄의 생활을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속죄를 가르침으로 이스라엘에게 속죄생활을 살게 하셨다. 그것이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가득히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잡히시던날 밤에 제자들에게 죄를 씻는 속죄를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씻는 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7. 처음사랑으로 돌아가려면
처음사랑으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최우선적으로 속죄생활을 회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속죄함의 사랑을 외면하고 구속함의 사랑만 다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처음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속죄함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속죄함의 사랑을 받는 것이 속죄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 전에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를 기억하려고 하고 그 때 받은 은혜로 돌아가려고 힘쓰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이것이 폐단인 것은 속죄생활을 잃어버리고 어제와 오늘 지은 죄를 아파할 줄은 알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기 전에 지은 죄를 아파하면서 구원받았을 때에 기억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사랑을 찾는 비결을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은 “포덴 에크핍토”인데 “포덴”은 원인과 근원을 말하는 의문사이다. “떨어진 것”은 “에크핍토”인데 “에크”와 ‘핍토“의 합성어로서 ”에크“는 시작하는 시점을 말하는 접두어이며 문제가 시작된 중심부를 말하는 전치사이다. ”핍토“는 떨어지다. 떨어뜨리다(fall)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생각하고”는 “므네모뉴오”로 “기억을 더듬다” “회상하다”라는 말이다. “회개하여”는 “메타노에오”로 “뉘우치다” “마음을 바꾸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속죄생활이 떨어졌는지 언제부터 속죄생활이 중단 되었는지를 기억을 더듬어 생각을 하고 회개하라는 말이다. 그 말은 속죄생활을 잃어버린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회개하여 속죄함을 받으라는 말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겠다고 했다.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회개가 없으면 속죄함이 없는 종교생활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회개가 중단된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여 속죄생활을 다시 찾으면 구속함의 처음사랑으로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더듬어 찾아 속죄생활이 중단된 시점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여 죄를 씻김받고 정결케 됨으로 처음사랑과 처음행위를 다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처음사랑 곧 주님을 최고조로 사랑했던 그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다. 주님을 최고조로 사랑함이 다시 찾아지면 처음행위 곧 주님과 함께 살고 주를 위하여 일하는 최고의 행위와 생활을 다시 가지게 되는 것이다.
회개를 하지 못하고 처음사랑을 다시 찾지 못하고 처음행위를 다시 가지지 아니하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회개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8. 맺는 말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는 생활을 산다.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지도 못한다.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행위를 다시 찾지도 못한다. 그것은 패배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이기는 것은 처음사랑을 다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행위를 다시 가지는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과실을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기는”은 “니카오”로 현재분사이다. “낙원에 있는”의 “있는”은 “에스티”로 현재동사이다.
“먹게하리라”는 중간태 에어리스트 곧 부정과거시제이다. 이미 과거에 먹게하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계속해서 이기는자 곧 계속해서 생각하고 회개하여 계속해서 속죄생활을 함으로 계속해서 처음사랑을 가지고 처음행위를 가지는 사람은 지금 생명나무과실을 주어 먹게하신다는 말이다. 생명나무과실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주시는 일용할 양식인 말씀을 말한다. 곧 하나님이 말씀의 양식을 오늘도 먹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속죄생활이 중단되면 처음사랑을 잃어버리고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면 처음행위를 가지지 못한다. 어디서 떨어졌는가 생각을 하고 회개를 하면 처음 사랑을 다시 찾음으로 처음행위를 가지게 되고 그러면 이기는 자가 되어 오늘도 주님이 생명의 말씀의 양식을 먹여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받지 못하고 하루 하루 사는 이유가 처음사랑과 처음행위를 잃어버리고도 생각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속죄생활을 다시 찾지 못하여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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