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생각,바른해석
회개가 없는 거짓된 교회생활
처음 창조된 사람인 아담이 살았던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거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다스리고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는 모든 것이 구비되고 부족함이 없는 곳이며 죄도 없고 죄로 인한 저주도 없으며 싸움도 다툼도 질병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을 이상향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사모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사모만 하고 얻지 못하여 일평생 저주와 사망의 그늘에서 살며 서로 뺏고 빼앗기며 싸우고 다투고 전쟁하면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짐승의 질서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강한 사람은 악인이며 약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다.
그와 같은 세상이 오기 전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스려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을 살았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께 위임을 받아서 세상을 다스리는 생활을 살았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짓고 영적으로 죽었을 때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다.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은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 갔다. 그는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말씀해 주신 메시야의 언약인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날마다 짓는 죄를 가죽으로 옷으로 가리워 주시는 속죄생활을 하는 은혜를 하나님께 받아서 살게 되었다. 그것이 아담의 교회생활이 시작이다. 이렇게 교회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서 시작이 되었다. 교회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밥이나 물보다도 교회가 더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을 살게 하는 곳이다. 교회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가지고 살면서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거룩해지고 거룩할수록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거룩할수록 자아를 이기고 죄를 안짓고 이기는 생활을 살면서 죄를 지으면 즉시 용서해주시고 지은 죄를 없이 해 주시는 속죄생활을 살아서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생활을 사는 곳이다.
이와같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배당에만 계시고 예배당에서만 만나는 분으로 오해를 한다. 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예배당밖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속죄생활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가 지은 죄를 항상 조건 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교회생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배당으로 출퇴근 하는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변화될리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도 받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예배당 안에까지 세상이 들어오는 악한일이 일어난다.
가인이 죄를 짓는 생활을 살면서도 회개하기를 싫어하고 속죄생활을 거부했을 때에 그는 교회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교회는 죄를 씻지 못하고 죄로 더럽힘을 받는 사람들은 영적인 정화(spiritual purification)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생활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교회를 더럽힌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죄가 연속적으로 따라 온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는 죄를 짓고 그죄를 회개시키려고 찾아 오신 하나님께 자기가 지은 죄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오히려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이냐고 하나님께 반항을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의 아버지 아담은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지만 가인은 회개를 싫어하여 땅에서 저주를 받고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주지 않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곧 영혼이 비틀거리며 육체가 방황하는 생활가운데 들어 간다.
(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쉬운말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방황하는 생활을 산다는 말이다.
가인은 아담이 살던 교회 에덴의 동편에서 쫓겨난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서 놋 땅에 거한다. 가인의 말이 그곳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가인이 아버지와 함께 교회생활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생활을 살았다. 그동안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사랑을 받고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쫓겨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마귀가 다스린다. 마귀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처음 사람인 아담을 속여서 갈취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이 세상의 영화와 다스리는 권세를 자기에게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눅 4: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다. 마귀를 가리켜 성경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라고 하는 것은 대기권아래 있는 이 땅을 마귀가 다스린다는 말이다.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죽이고 빼앗는 악한 질서가 있는 곳이며 힘있는 자만 살아남는 냉엄한 현실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쫓겨나는 가인은 더이상 하나님의 보호하심 (protection)을 받을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인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나님께 탄원을 한다. 그리고 가인은 놋땅으로 쫓겨갔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담이 쫓겨난 에덴의 동편은 케뎀(קֶדֶם) 이며 가인이 쫓겨난 에덴의 동쪽은 케뎀에서 온
키드마(קִדמָה)를 쓰는데 그것은 에덴의 동쪽에서 더 동으로 나간 것을 의미한다.
“놋”(נוֹד)은 “방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해 주었음에도 사람에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을 쌓고 그이름을 에녹이라고 아들의 이름으로 짓는다. 그만큼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성으로 자기를 보호해야 할정도로 무서운 곳이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가인이 살았던 놋땅과 방불한 메소포타미아에서 그의 삶이 시작이 되었다. 거기는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곳이며 그의 아버지 데라도 우상숭배자이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그것이 사람이 만든 종교이다. 교회는 종교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각각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은 것이 우상이고 종교이다.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추구하고 찾아가는 하나님을 믿으면 가짜 하나님이 되고 그것을 믿고 섬기면 우상이 되고 종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심으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생활을 하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지인 아버지를 따라나섰기 때문에 하란에 머물러 살면서 구원받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아브라함이 칠십오세에 아버지 데라가 죽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갔지만 약 오십년 동안을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을 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세상의 현실과 믿음의 현실사이에서 방황을 한 것이다. 이삭을 바침으로 지은 죄를 용서받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거룩함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순종했을 때에 지속적인 속죄와 거룩함의 맹세를 받고 하나님의 벗이 된다. 그 후로 175세에 죽을 때까지 오십년 동안 다시는 방황하지 없는 승승장구하는 믿음으로 산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참된 교회생활의 본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의 눈에 아브라함은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질서아래서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본 것이다. 나중에 아비멜렉은 이삭에게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다고 하면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고백한다. 그는 블레셋 왕으로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이삭의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생활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이다. 날마다 짓는 죄를 가끔 회개하고 속죄하는 사람은 거룩한 생활을 살수 없다. 죄를 지을 때마다 항상 속죄하는 생활을 살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 하나님의 친구는 원수마귀의 성문을 얻음으로 마귀를 정복하기 때문에 마귀가 주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모든 문제를 항상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믿음으로 산다. 그래서 방황이 끝나는 것이다.
맹세로 속죄생활을 보증
속죄생활이 없는 사람은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생활(church goer)을 하는 것이다. 예배당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은 확신도 흔들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그 결과 가인과 같이 장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면서 근심과 걱정가운데 산다. 그래서 영혼이 흔들리며 육체가 방황하는 생활을 산다. 목사나 신부나 장로나 집사나 차별이 없다. 어느 교단의 우두머리나 카톨릭의 교황까지도 또 이단의 괴수들까지도 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속죄생활의 거룩함이 없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속죄생활로부터 오는 구원의 확신의 중요함을 이렇게 말한다.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는 받은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을 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지속적인 속죄생활을 보장하는 맹세를 하신 것이다. 날마다 지은 죄를 속죄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이 부분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까지는 말을 하지만 속죄생활은 말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는 우리에게 맹세를 금하신 하나님이 맹세를 베푸시면서까지 구원의 확신의 필요성을 알게 하신다라고 말한다. (Certainty of salvation is therefore a necessary thing and in oder to secure it God forbids rash swearing has deigned take His oath) 히브리서의 주제는 학자들의 눈에 가리워져 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항상 백성의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시는 지속적인 속죄생활을 통한 안식을 말하고 있다.
몸의 구속
지방에서 소를 기르는 어떤 사람이 “세상사람들은 내가 육신까지 잘돼야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영혼만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몸도 세상의 질서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몸의 구속이라고 말했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양자될 것”은 “휘오데시아”(υἱοθεσία)인데 명사이기 때문에 “양자될 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양자 됨”이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칼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양자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몸이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선행구절인 15절에서는 우리가 이미 양자가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양자 됨을 기다리는 것은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몸의 구속은 몸도 죄와 세상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살리시리라”는 “조오포이에오”(ζωοποιέω)는 “살게 하다”(make alive)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죽을 몸”이라고 번역을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드네토스”(θνητός)는 형용사이지 동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죽은 몸”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롬 6:12, 고후 4:11, 5:4, 들도 공히 형용사를 미래시제의 동사처럼 번역을 해 놓았다. 로마서 8장 23절의 “양자 될 것”이라는 번역도 같은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세신앙(來世信仰)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내세신앙이 이단들이 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잘못된 종말론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믿는 이안에 들어와 계시는 이유는 죽은 몸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공유(共有)하게하기 위함이다. “기다리느니라”는 “아페크데코마이(ἀπεκδέχομαι)인데 현재분사로 지금 항상 기다리는 것이다. 만일 학자들의 말과 같이 몸의 구속이 재림이후에 일어난다면 그것을 지금 항상 기다린다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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