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빈 장로

우리교회의 어느 여집사님이 어느 기독교방송을 종일토록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송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들마다 전도를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전도를 강조하고 전도설교를 하는데 전도를 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전도가 안 되고 교회마다 예배참석인원이 줄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도를 강조하는 설교를 저마다 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서야 이 땅의 교회들이 교인들이 줄고 있는 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 전도를 강조한다고 해도 교인들이 움직이지 않는 다는 영적인 현실과 교인들이 전도를 하지 않고 못할 것임을 뻔히 아는 안타까운 현실은 교회 지도자들을 더욱 허탈하게 만들고 있으며 목마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 못해서 이 전도방법 저 전도방법을 해보지만 그만둘 수도 없고 손을 놓을 수도 없어서 그냥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전도방법이나 프로그램 전도기술이 없어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님을 빤히 알면서도 뾰쪽한 대안이 없어 이것저것 해보지만 시작단계에서부터 된다는 확신이 없으니 잘 될 리가 만무(萬無) 합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의무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일과 같이 돈으로 되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것도 계속할 수 없고 오히려 그동안 여러 가지 전도방법에 시달리고 열매는 없다 보니 전도를 하는 사람들까지도 "전도가 절대로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도를 나가고 전도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전도를 할 대상을 찾았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의 도덕성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것 때문에 세상이 교회를 신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손을 가로 저으면서 "필요 없다"는 말을 되풀이 하는 사람들을 연거퍼 만나게 되면 기운이 죽- 빠지게 되고 전도를 할 의욕조차 상실하게 된 것이 오늘 교회가 그리고 교인들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그런가하면 전도에 관한한 현대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는 말씀대로 예수를 증거하고 전도를 하는 것은 성령의 전적인 권능과 역사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은 온전히 배제되었으며 온갖 인간의 방법과 테크닉에다가 상업적인 방법들까지 동원됨으로 교회끼리 반목을 조장할뿐더러 불신자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전도기술자를 길러내려고 하고만 있지 주님을 따르는 거룩한 인격과 생활을 가진 전도자를 만드는 일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생각조차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도는 점점 더 행사와 형식과 프로그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회성으로 해치우는 해프닝으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영적무기력감에 빠진 종교인들로 자리를 채우게 되는 일이 오랫동안 진전이 되어 왔다.  

그러는 가운데 지난 이십년동안은 그럭저럭 대도시로 신도시로 인구가 유입이 되면서 그런대로 교인들이 늘어나고 땅을 사고 건축을 하고 교인들이 더하는 재미로 설교도 괜찮고 목회도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으며 지내왔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마다 줄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안의 심령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혼이 파리해져 가고 있으며 강단으로부터 영적인 충족이 되지 않음으로 목마른 심령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모하는 심령까지 상실한 교인들은 아주 세속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부흥회를 해도 교인들이 모이지 않으며 저녁예배의 동공화 현상은 의식이 있는 목회자들을 말할 수 없는 두려움가운데로 내몰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자신의 영혼의 갈증도 이제는 극도에 달해서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섭렵하다가 이제는 지쳐서 영적 무기력감에 빠져 버리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아무런 감동이 없는 설교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씀으로 차마 그만 두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여 그냥 그냥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수다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교회 안에도 없는 은혜를 세상에 전할 수가 있겠느냐 라는 질문을 교회 스스로에게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조차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세상에 나가서 그 은혜를 어떻게 설명을 할수 있느냐라는 말입니다.

더 악한 것은 요즈음은 교회 안에서 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강단에서 십자가의 눈물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으며 눈물이 없는 예배를 드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는 것은 커녕이고 받은바 은혜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 오늘날 교회안의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전도가 전혀 불가능하고 교인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강조를 해도 움직이는 척도 할 수 없어 목회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은혜가 없어 나름대로 속내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를 하라고 설교를 하는 것은 마치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병들에게 치료는 안 해 주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내모는 듯한 야속한 말이요 듣는 이들을 오히려 시험에 들게 하는 무모한 시도요 순종할 수 없는 불가능한 권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교회의 약점을 하나 인정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사람, 영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전도할 사람이 없고 열매를 맺는 사람도  없으며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사람이 드물고 세속과 환경을 이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 희귀하며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영적 전력을 갖춘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수천명, 수만명이 있는 교회에서도 영적인 사람을 찾기가 어렵고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의 일군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는 것 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 말은 오늘날 영적인 전력을 갖춘 진정한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귀에게 위협을 주는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마귀에게 위로를 주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자기도 모르고 원수인 마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마귀와 싸운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교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상태나 그들의 영적전력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소름을 끼치게 하는 현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교회 안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냉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난 수십년동안 한국교회는 건축을 하고 교회를 크게 하고 교인들을 유치하며 교인수를 늘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전도방법과 교육프로그램들이 고안되고 외국에서 유입이 되었으며 셀 수 없는 많은 세미나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치고 목회테크닉을 가르침으로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목회하지 못하고 목회기술자들로 전락을 시켰습니다. 수많은 방법들은 "오직 성령으로"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정책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을 교회 안에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땅을 산적도 없고 예배당을 건축한 적도 없으며 프로그램이나 전도방법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을 성령의 사람으로 길러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날마다 믿는 자의 수를 더하게 하는 엄청난 일을 일구어 냈습니다

목회자들마다 '일군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동역자가 없고 전도자가 없다.

왜 사람이 없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현대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적게 잡아 지난 사오십년 동안 사도행전적 교회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온 교회이었음을 우리는 시인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의 피흘리심으로 회복된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했다. 세속의 물결이 교회를 위협하며 덮쳐 왔다. 죄가 속속히 교회 안으로 유입이 되었고 산업화의 가치관과 '잘살아 보세'의 철학은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우상으로 교회의 숨통을 조여 왔으며 교인들은 점차 영적인 감각을 상실하고 죄를 이기지 못하고 이중적인 생활의 늪 속으로 점점 깊숙히 빠져 들어 갔다.

생활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영적실재(靈的實在-Spiritual Reality)를 상실한 주님의 신부된 교회는 예배에서도 주님의 임재(His Presence)를 상실하고 형식적(形式的)이고 의식적(儀式的)인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는 영적예배가 아니라 종교적인 예배로 전락이 되었다. 기도의 응답이 없고 찬송의 기쁨이 사라져 갔으며 급기야는 인간의 기호에 맞는 복음성가들이 찬송가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는 예배당건축을 중시한 나머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영혼이 파리해져 가는 줄도 모르고 헌금을 강조하고 교인들은 어느새 예배당건축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최고의 가치로 인식을 하고 건축헌금을 힘써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축헌금을 많이 하고 그와 같은 희생을 많이 한 사람들을 뽑아 안수집사로 장로로 세우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어리석음에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으며 그래서 벌써 오래전부터 '돈 없으면 장로 못 한다'는 말이 염병처럼 돌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그들에게 눌려서 목회에 평지풍파가 일어나는 유익이 없는 소모전에 말려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도행전의 교회와는 정반대로 Building Construction은 열심히 했는데 Spiritual Construction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가 오래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이자 부담으로 '복음에 빚진 자' 로서 밤낮으로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부담을 가져야할 교회가 아니라 '은행에 빚  '사채업자에 빚진 자'  '세상에 빚 진자' 로서 이자의 짐에 눌려 마치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와 같이 '세상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적막함 가운데 내려앉게 되었다. 이미 이자와 빚을 해결한 교회도 영혼이 파리해지는 동굴 속을 뚫고와 영적으로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입었다.

그리고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는' 초대교회의 역사와 영혼구원은 상상도 못하고 남보다 빨리 신개발지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 건축을 잽싸게 함으로 '날마다 이사 오는 교인들이 더하기를' 기다리는 나약하고 병들고 사도행전적 교회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타락한 교회로 전락이 되고 말았다. 이사 오는 교인들의 악함은 '하나님의 맘에 맞는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악함으로 많은 목회자들로 저들에게 맞는 교회, 저들에게 맞는 설교, 저들에게 맞는 예배, 저들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 해야만 하는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그래서 하나님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는 인본적인 목회 인간중심의 예배와 인본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급기야는 돈 있는 교회들은 예배당 건축에 체육관과 레저시설을 곁들임으로 주님이 말씀을 하신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교회'를 주장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시대에 맞추어 예배를 기능화 하는 멀티미디어 예배를 드린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회복은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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