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아나기노스코”(ναγινώσκω)인데 아나”(να)기노스코”(γινώσκω)의 합성어이다. “아나는 전치사로서 위에또는 반복이라는 뜻이며 기노스코체험으로 안다또는 확신 한다라는 뜻을 가진다. “기노스코는 머리로 알고 이해하는 그노시스라는 단어와는 달리 말씀에 순종하고 체험하여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라는 말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서 순종하게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단수동사인데 그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항상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말씀을 읽는 자는 항상 한사람이었다. 사도행전의 교회도 말씀을 읽는 자는 항상 한사람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여러 사람이 되면 성령으로 질서를 잡아 한사람씩 순서대로 예언을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 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고전 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 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아나기노스코의 시제는 현재분사이다. 그것은 곧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이 말씀을 쉬지 말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예언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성경의 육십 육권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다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다 열심히 가르쳐야하지만 그 모든 책들보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장 으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 66권중에서 구약성경 36권은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27권인데 그중에 사복음서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뭇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온 세상에 땅 끝까지 흩어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되면서 처처에 교회가 세워지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2권의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아시아와 유럽의 각처에 세워진 교회들이 세상과 마귀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시험에 들고 연약해지고 처음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리고 처음 들은 것을 지키지 못하고 상실하는 교회의 아픔을 고치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들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쓴 편지들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성경 육십육 권중에 맨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함을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이 계시의 내용을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기록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의 예언 중에서 대부분이 성취되었으며 그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아직 남아 있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책의 어느 부분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깨어 있는 성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 예언의 말씀의 어느 부분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요한을 통해서 이 책을 주신 목적이 그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시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책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책이며 다른 책들보다 이 책을 더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이 책만큼 생소한 책이 없고 이 책만큼 어려운 책이 다시없으며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고 배우는 것도 꺼려지는 책이다. 그것은 성경책중에서 이 책 만큼 해석의 오류가 많은 책이 없으며 논란이 많은 책도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책에 대한 혼란스러운 이론과 해석으로 인하여 많은 부작용들과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들 그리고 세상까지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지나간 길고 긴 세월동안에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이고 성경적인 확실한 해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가 이 책의 말씀을 교회안에서 읽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고 그것을 아예 중단을 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이다.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요한의 사후에 얼마 못가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것을 요한은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말했다.

 

(요일 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는 교회이다. 처음부터 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잃어버린 교회는 주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의 사후 얼마 되지 못해서 3세기의 교부들의 시대부터 지적이고 교리적인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 했다. 어떤 교부들은 그들의 이름에다가 변사(apologist)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교회안에 학자들과 변론가들이 많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거부감을 가지고 배척했던 사람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 중에 다수가 전도의 미련한 것인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복음전도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를 따라가는 사도들의 발자취를 밟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 대신에 기독교의 교리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웠지만 교부들과 로만 카톨릭은 기독교를 세웠다. 기독교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는 복음이 없어도 기독교로 존재를 하고 기독교의 일을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회의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는 원심력(遠心力) 있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교리는 자기들의 조직을 중심으로 뭉치는 구심력(求心力)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는 복음을 전할 줄을 모른다. 대신에 교인들을 모으기 위하여 바리새인식의 전도만을 한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몰라도 되고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세확장의 수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교훈인 복음대신에 교리가 필요했던 것은 교리를 가지고 자기들의 조직을 수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를 가지고 반대파를 출교하고 죽이는 악한 일을 자행했다. 그것은 세상이 보기에도 악한 일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수천년동안 기독교를 싫어하고 증오한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세상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지 세상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될수 없는 것이다. 그 옛날에 유대교가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함을 받게 한 것은 그것이 이미 생명이 없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초기의 교부들은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미련하게 하신 세상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 다수는 변증법을 배운 자들이며 신 플라토닉의 철학사상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즈음부터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소홀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에 해당하는 선비들과 변론하는 자들인 변사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과 같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들도 아니었으며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르치기에는 합당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부터인가 요한계시록은 가르치기를 가장 꺼려하는 책이 되었다. 종교개혁자인 요한 칼빈같은 이도 다른 책은 주석을 하면서 유독 이 책의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그도 그자신이 이 예언의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말씀들은 잘 알고 있었는지 몰라도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의 제자는 성령께서 장래 일을 알게 하신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누가 장래 일을 모른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장래 일을 알려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장래 일을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장래 일을 알리시지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도 성령님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장래 일을 절대로 알게 하시는 법이 없다. 만약 교회의 지도자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에게 장래 일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목회도 신학도 주님과 맞지 않는 것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교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없는 교회는 원수 마귀와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교리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황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씀하는 짐숭이요 적그리스도라는 지적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로만 카톨릭은 그 조직자체가 와해될 정도로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적그리스도라는 거짓말과 네로황제가 적그리스도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예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다니엘서의 칠십이레의 예언을 거짓되이 풀고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연결지어서 온갖 거짓말을 지어 낸다.

종교개혁이후에 로만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된 교회는 아직까지도 근 오백년 동안의 로만 카톨릭 종말론의 거짓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바로 잡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이용한 마귀의 거짓말이 세상에 창궐하는 종말론의 대 혼란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의 거짓말에 근거하여 요한계시록을 해석한 것이 바를 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무지가 근간이 되어 결국 1844년에 윌리엄 밀러가 주의 재림에 관한 거짓말을 함으로 교회와 세상을 혼란스럽게하고 그들은 더 이상 교회에 있을 수가 없어서 나가서 만들은 것이 우리가 안식교라고 알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이다. 그 후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거짓말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온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미리 예언한 시대가 되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나 그 수를 셀 수 없는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이 요한계시록은 교회에서 가르치기를 가장 꺼려하는 책이 되었다. 다른 책으로는 설교를 해도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일은 드물다. 다른 책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 목사나 교인들 할 것 없이 가장 무지한 책이 요한계시록이 되었다. 그리고 마귀는 더욱 마음을 놓고 이 책에 연관된 거짓말을 가지고 교회를 공격하여 이 책을 호기심으로 대하는 무지한 영혼들을 탈취해가는 일을 벌여 온 것이다.

이 책은 틀린 것을 맞는 것처럼 가르친 사람들에 의하여 임의로 추정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사사로운 해석이 진리인 것처럼 말을 해서 오히려 교회안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것 중에 하나는 가짓말이 난무하다보니 시중에 나와 있는 온갖 종말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통교회의 종말론이나 이단들의 종말론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고 비슷할뿐더러 때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어서 일반에 큰 혼란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요한계시록의 혼잡스러운 이론들이 너무나 더럽게 느껴져서 이 책을 일부러 멀리하고 접근하지 않았다. 40여년동안 성경의 다른 책들은 부지런히 가르치면서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3장까지만 가르치면서 교회의 현실을 깨닫게 하는 데에만 주력을 했다.

그런데 나에게 주님은 2011년 어느 날 요한계시록 12장부터 주욱 열어서 보여주시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13장으로 또 다른 장들로 인도해 주시면서 이전에 세상에 없던 바른 해석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짝을 맞추고 그 말씀이 역사속에 이루어진 사실들을 확인함으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또 헬라어 시제와 히브리어 문법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미래에 재림 때에 일어나는 일처럼 의도적으로 오역을 한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현재의 일도 미래에 재림 때의 일인 것처럼 번역을 잘못한 것도 드러 내어 주셨다. 성경의 분문을 훼손하여 번역을 한 것들도 많이 찾아 내게 해 주셨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배우는 분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먼저 들었던 기존의 지식과 너무나도 차이가 나고 전혀 새로운 해석들을 대하면서 많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근 십년이 지나면서 거의 매주 끊임없이 이 책의 비밀들을 알려 주시는 대로 읽고 가르치고 하는 가운데 이제는 그런 의구심들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배운 사실을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면 그들이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남에게 들은 지식을 가지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과격하게 대적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이천년의 무지의 역사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결과 인 것이다. 그것들은 성령께서 알게 하신 장래 일이 아니라 사람이 임의로 추정하고 해석한 것에 근거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예언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침으로 지난 이 천년동안 우리의 안에 들어 와 있었던 마귀의 거짓말을 찾아내고 물리쳐 버려야 한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이 말씀을 부지런히 거듭해서 가르쳐야 한다. 지 않는 말씀 곧 가르치지 않는 말씀을 누가 듣겠는가?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말씀을 누가 순종을 하겠는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겠는가? 그런 사람이 누구에게 이 책을 가르치겠는가? 이제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정신을 차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교회 안에서 부지런히 읽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복을 받은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것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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