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과 종말론의 해석이 어지러워진 이유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듣는아쿠오”(κούω)로서 복수동사이다. “읽는 자가 단수인 반면에 듣는 자가 복수인 것은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여러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시제는 현재분사이다. 곧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듣는이라는 말은 말씀을 귀로 듣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사이에서도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을 듣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잘 이해하고 암기를 하고 또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 말씀이 본인의 행동으로 나오는 순종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말씀을 안 듣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책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여덟 번 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같은 말씀을 복음서에서도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는 그냥 해부학적인 귀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귀이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이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아 듣는 것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인 그의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4: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너희는 주를 따르는 제자들을 말한다. “외인은 제자들과 같이 한자리에서 주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를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가리켜 하신 말이다. 주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즉시 그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외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주의 제자들과 다른 것은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의 제자들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들었으나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오늘날도 순종해야 하는 부담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또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야 하는 부담이 없이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외인들이다. 그렇다면 순종하지도 않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것은 외인보다도 더 멀리 간 악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며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목사고 장로며 가르치는 교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살지 않는 사람은 주의 제자가 아니라 외인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0절의 말씀에서 낫지 못하면의 헬라어인 메 페릿슈오에서 페릿슈오는 부정과거동사이다. “들어가지 못하리라메 에이셀코마이의 들어간다는 뜻인 에이셀코마이도 부정과거동사이다. 부정과거동사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을 말하는 시제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였었더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께 부르심을 받을 때에 하늘나라에로의 청함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다. 그들은 외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 와 있는 주의 제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고 순종하는 이가 주님의 제자요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들을 귀는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외인들에게는 들을 귀를 주시지 아니 하신다. 같은 말씀을 들은 어떤 사람은 순종하고 어떤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것은 다 하나님께 로서 말미암은 것이다.

주님은 외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면서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의 말대로 외인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외인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완악하게 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시고 눈을 감기운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으면 안 되는 외인들이기 때문이다. “못하게 함이니라메포테”(μήποτε)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lest at any time”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주님이 영안을 열어 보여 주시고 들을 귀를 주심으로 듣게 하시고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 돌이켜 회개하여 고침을 받게 하신다.

나는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꼬박 일년육개월동안을 하루에 열두세시간을 말씀을 읽으면서 살았다. 그것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성경에만 매달려서 살았다는 말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이 의식중에 또 무의식중에 말씀 속에서 지나갔다. 하루 세 번의 식사와 네시간 잠을 자는 것 외에는 말씀과 기도로 살은 것이 하루 생활의 전부이었다. 그렇게 나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주님은 단 하루도 나를 외인으로 취급을 하신 적이 없었다. 날마다 항상 친절하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나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크나 큰 아픔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이세상의 어떤 예리한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나의 마음과 영혼과 골수를 쪼개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픔은 기도가 되었다. 그 기도는 듣고 깨닫게 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었다. 그 기도의 눈물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눈물이 시냇물처럼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밤마다 베겟닙을 적시면서 잠에 들곤 했다. 그러는 중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 엄습해 들어 왔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하루 종일 한 제목으로 기도하는 일이 일어났다.

 

주님 말씀을 열을 깨닫고 하나를 행할까 심히 두렵사오니 하나 깨닫고 하나 행하게 해주세요

그것은 나에게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말씀이 생각속에 젖어 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언어가 되고 말씀이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중에 하나씩 하나씩 나의 행위로 순종이 되어서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말씀과 묵상과 기도와 그날 주신 일용한 양식인 말씀으로 생활하는 것이 하루의 전부가 되었다. 나의 동생들이 내가 주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주의 말씀으로 생활을 사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바로 밑에 남동생이 어느 날 나에게 반응을 해 왔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어

 

그 말은 그 때까지 내가 23년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말이었다. 아 나 같은 것도 변화 되는구나. 그것은 내가 주님에게 외인이 아니라 제자라는 증거가 되었다. 나는 그 증거를 나의 동생으로부터 취한 것이다. 나는 동생들이 보기에도 되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말씀으로 주를 따라가는 제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그들도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서 이전에 나와같이 행했던 허황된 종교생활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한 말씀의 똑같은 사건이 우리 집에도 일어난 것이다.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오늘날까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마음이 먹먹하도록 가장 안타까운 일은 말씀으로 변화받기를 사모하고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지 못해서 울부짖는 심령을 찾기가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의 재료로 이용을 하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들의 의로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많이 읽고 연구하고 깨닫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하는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없는 외인들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신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말씀이 아직도 항상 비유이며 상징적인 것이며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팩트(fact)로 하여 가르치신 것같이 상징을 사실로 풀어야 하는데 그들은 비유를 비유로 풀고 상징을 상징으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더 가중 시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외인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신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을 비유로 풀고 상징으로 풀고 자기 생각대로 사사로이 풀어서 그 해석을 혼잡하게 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요한계시록과 그에 연관된 종말론 해석은 온갖 잡동사니 이론과 가치 없는 해석으로 가득 찬 쓰레기통과 같이 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것들에 넘어가고 미혹되는 사람들도 역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닌 외인들이기 때문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간단명료한 것이다. 진리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가장 단순(simple)하고 유쾌한 것이다. 성경에는 혹자들이 말하는 난해구절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그의 자녀들에게 알수 없는 말씀을 주실 리가 없으신 분이다. 모든 예언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난해구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님에게는 외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혀 들을 수 없는 비유와 예언적인 용어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에게는 난해구절이란 있을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말한 것과 같이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에 외인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이사야는 유다사람들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이상을 그릇 푸는 일이 있다고 말씀했다.

 

(28:7)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28: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28: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28: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28: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구약시대는 물론이요 지나간 이 천년동안 교회에 요한계시록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종말론에 치우친 지식을 자랑하던 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말씀으로 젖먹이도 가르칠 수 없고 깨닫게 하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지식이 지극히 부분적인 것이며 전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차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죽었다가 깨어나는 한이 있어도 그 말씀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외인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신 이유이며 이 책을 외인들이 절대로 알아 듣지 못하게 예언적인 용어로 말씀하신 이유인 것이다.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의 제자들에게는 외인은 물론이고 이전에 신실하던 선지자들과 의인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하시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하시고 돌이켜 고침을 받게 하신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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