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 부부와 함께 교제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목사님은 훈련은 여러번 받았지만 어느정도 감화가 안된 분이었고 사모님은 적극적으로 성경학교를 십년가까이 다니면서 자신이 잘 안변하는것때문에 항상 눈물로 보내시는 분이었다. 남편 목사님의 말씀은 대체로 사모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었는데 불만을 말하면서도 항상 "우리 사모가 너무나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을 빼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더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하시면서 그동안 사모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섭섭한 일들을 숨김없이 다 내어 놓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아직도 사모님의 말이 걸러지지 않고 나오는 것에 대한 아픔도 말씀을 하셨다. 사모님은 그냥 자신의 허물이 부끄러워서 그냥 잘못했다는 말과 표정으로 일관을 하는 분위기였다.

사모님의 말이 실수로 나왔어도 그것이 사모님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면 목사님은
또 쉽게 긍정을 하시곤 했는데 그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내게 깨닫게 하시는 한가지 사실이 있었다.

옛날에 어른 들을 보면 호미가 다 닳아 빠져서 거의 쓸수가 없게 되면 새호미를 장에서 사오는데 그것을 헛간에 걸어 놓고도 한참동안은 일을 나갈 때에 정작 새호미는 놔두고 헌호미를 들고 나가서 일하곤 했다. 그것은 새호미는 손에 섫고 헌호미가 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못쓰게 된 죄인인 내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옛것은 지나가고 새피조물이 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을 이룬 것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당하고 있는 딜렘마가 무엇인가? 생활속에서 주님이 다시 살려 주신 새사람이 나가야 하는데 아직도 옛사람으로 살고 말하는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옛사람의 속성이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마치 새호미를 걸어 놓고도 몸에 익은 헌호미를 내다 쓰기를 즐겨하는 촌노들과 같이 옛사람에 속한 혈기와 정욕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이 밀고 내생활의 현장속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와같은 일이 반복이 되다 보면 아예 새호미가 없는것같이 여겨져서 새피조물은 생활속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그래서 자포자기한 상태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는 않은 것이다.

그이유는 무엇보다도 새사람이 익숙하지 못한 것인데 새사람이 익숙하지 못한 것은 새사람에 대한 지식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머리로는 혹 알고 있을지라도 내의식과 생활에 배어 나오기에는 아직도 옅은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차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아주 악한 상황속에 들어 갔을 때에도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피조물이라는 지식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지식에 확고 부동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곧 후회할 말들과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헌호미가 나오듯이 익숙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을 읽고 즐거워 할 뿐 아니라 그말씀을 주야로 묵상을 했고 그와같은 것을 오고오는 세대에 가르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말씀이 지식으로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악한 생활의 환경속에서도 생활로 나오고 행동으로 나올정도로 역동적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성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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