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은 전도서를 쓰면서 스스로를 전도자라고 일컬었다.

오늘날도 스스로를 가리켜 전도자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 전도자의 뜻이다. 전도를 한다고 전도자가 아닐 것이고 목사라고 또 설교한다고 솔로몬이 말한 전도자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전도자란 우리말 그대로를 풀면 '도를 전하는 사람'이다. 영어성경에 보면 'Preacher'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설교자요 또는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어적인 뜻을 보면 '청중을 모으는 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전도자라는 말이다.

그렇다 솔로몬이 말한 전도자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청중이 모였고 청중을 몰고 다닌 것이 전도자인 솔로몬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청중을 많이 모은다고 전도자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도 대중적인 인기 몰이를 하는 말쟁이들이 수다한 시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텔리비젼에 나오는 인기 있는 강사라든가. 또는 여기저기서 강연회를 통해 청중들을 모으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종교적인 교인들, 생명이 없는 종교인들, 영생은 있지만 생기를 상실한 교인들에게 그럴듯한 화법과 지식으로 혹하게 하여 수만명씩 청중들을 모으면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는게 틀림없지 않습니까?'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와 같은 자리에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반면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청중이 모이지를 않아서 마음고생들을 하고 있다. 마음고생으로 될 일도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목을 매어 달고 교인들을 늘리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기가 좋다 하면 여기로 몰려가고 저기가 좋다고 하면 저기로 몰려가면서 어떻든지 교인들을 늘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애쓰는 것을 보면 때로는 애처롭기까지 한 모습을 떨쳐버리기가 힘이 든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알수 있음에도 그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 수 더 떠서 초청하지도 않는 부흥회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가려고 애를 쓰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자기를 불러 달라고 자천하는 일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부흥회 나가는 것 자체를 자랑삼아 말을 하지만 그를 통해 일어나는 역사는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많이 있다.

지난 월요일 날 어느 목사님이 친구목사님 말을 하면서 '요사이 왕권회복인가 뭔가에 빠져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은 전도훈련을 받고 전도하면서 자기가 사는 도시에 거룩한 부흥이 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면서 전도현장을 지키던 분이었다. 중국선교도 많이 가고 공부도 많이 해서 박사과정도 마친 분이었다. 그 도시에서 집회를 할 때에 그분이 말하기를 '장로님 제가 훈련을 받고 전도를 할 때에 교회가 갑자기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제가 큰 실수를 했는데 어느 부흥사를 모셔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사가 나와 상의도 없이 무리하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일을 했고 그로 인해 결국은 헌금을 작정한 사람들이 교회를 다 나가버리고 전도도 중단되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와 같은 곳에 빠져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하는 곳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친구로서 너무나 불쌍하다고 말을 했다.      

오래 전에는 수원에 사는 어느 교인이 전화를 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장로님 왕권회복이라고 아십니까? 부천에 있는 건데요 우리목사님이 거기에 빠졌어요. 평신도인 제가 봐도 아닌데 하도 수상해서 거기에 몰래 가보았더니 말씀도 없고 이상한 말을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을 쓰러뜨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능력을 받으려고 애를 쓴답니다."라고 전언을 하면서 여차하면 교회를 나갈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렇게 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려 보라고 권면을 해 주었다.
지난주에 당사자인 그 목사님이 "장로님 거기 잘못된 거예요 저도 얼마동안 나갔었는데 이상해서 그만 두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

사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전도훈련을 받고 지금까지의 삶이 아니다 싶어서 회개를 하고 전도를 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부흥이 되었었는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경건생활이 뒤따르지를 못하니까 이내 주저앉고 사람들의 말에 솔깃해서 여기저기에 빠져 그나마도 가까스로 찾은 영혼의 초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길에 빠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쓰러뜨리는 사람들이 전도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속아서 교인들을 넘어뜨리고 쓰러뜨려도 변화되지를 않으니까 자포자기하고, 또 목회를 크게 하며 기도원에서 집회를 하는데 찾아가서 노방전도가 잘못되었다고 비방하자 울고 회개하며 실신하다시피 통회자복하고 서원했던 전도를 접고 소위 말하는 큰 목회하고 싶은 마음에 집회마다 참석을 하고 그 곳에서 말하는 시간을 채워가면서 기도하고, 강단에서 그 목사님에게 회초리까지 맞아가면서 울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분처럼 목회 하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 분은 외형적으로 더 크게 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분을 따라 다녔던 분들은 지금 어떤 목회를 하고 있는가?
전도훈련을 받은 이들이 양육이 부족하다하여 '양육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에 귀를 닫고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전도는 예수전도협회요 양육은 어디'라고 말을 하기도 하던 일들이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내적치유니 상담이니 하는 것들에 따라 다니다가 결국에 얻은 소득이 무엇인가? 전도현장을 상실하고 영혼사랑을 잊어 버리고 전도의 열정을 상실한 것외에 무엇을 얻었는가? 그렇게 하던읻르의 결국이 무엇인가 다시 옛날모습으로 돌아 앉아 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니란 말인가?

사실 주님 편에서 볼 때, 예수전도협회에서 눈을 뜬것은 목회자가 먼저 주안에서 양육을 받아야 교인들을 양육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뿌리를 박고 내려야 하는데 주님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이 모임 저 모임 이 지식 저 지식을 찾아다니다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교회도 개인도 영적으로 더 피폐해지고 황폐해져서 귀한 세월을 다 보낸지가 어언 십년이 넘지를 않았는가?

지금도 주님처럼 살지 못하는 이들, 주님처럼 전도하지 못하면서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핑게를 대는 사람들, 전도는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능력 받기를 기다릴 것을 종용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을 따라다니며 빚을 내서 미국이다 카나다다 하여 허황된 여행을 다녀오고, 교인들은 영적인 충족이 되지 않아 목말라 고통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지난번 전도여행에는 어딘가에 빠져서 5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그 밑에 수백 개의 교회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교회사모님이 참석을 해서 영적인 목마름에 울부짖으면서 교회는 외형적으로 부흥이 되었지만 스스로의 영적갈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분이 집중코스에 모시고 온 어느 교회 사모님은 거기에 빠져있는 교회가운데 빚을 지지 않은 교회가 한 교회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울은 사랑을 심으라고 했는데 거기서는 '물질을 심으면 물질을 거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어떤 목사님의 말이 얼마 전에는 중금속이 밖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공기정화기를 심으라고 해서 많은 교회들이 빚까지 져 가면서 공기정화기를 사주느라 법석을 떤 적도 있다고 한다. 한때는 양복을 심으라 해서 요란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전에 말한 그 사모님이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잘못되었습니다. 영적인 것을 심어야지 왜 매번 육신의 양식이나 심고 물질만 심으라고 하는가?'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미나 한 번할 때마다 적지 않은 회비수입으로 돈을 많이 모아서 땅을 수없이 많이 사고 공장도 지었다고 한다. 언젠가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피라밋드식으로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조직이 그렇다고들 한다. 어떤 양복장사에게 공기정화기 판매업자에게 개척교회의 피묻은 돈이 다 들어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 광주의 어느 목사님은 심으라는 말에 넘어가서 자기교회에도 없는 스타렉스를 융자로 뽑아서 이웃교회에 사주었다가 융자금을 갚지 못해서 신용불량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는 말도 들린다.

어리석음이여! 어리석은 자여! 언제까지나 속아서 살려는가?
스타렉스를 심고 물질이 부요해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미신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것저것을 심어서 물질걱정을 아니한다하여 남의 돈까지 끌어다가 심는다는 사람이나 남의 돈을 융자해서 카지노에서 돈을 날리는 허무한 인생이나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먼저 말한 어떤분의 말이 거기서 가르치는 전도방법을 가지고 전도를 나갔는데 구원파를 만나서 공식대로 전하니까 그 구원파 교인이 자기가 하겠다고 우기길래 해보라고 했더니 자기가 일주일동안 할 말이 그의 입에서 줄줄줄 나오는데 똑 같더란다. 또 어떤분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박옥수 창세기설교를 뽑아서 주길래 읽어보았더니 몇 년 전에 고신대 강당을 빌려서 목회자들 삼천명을 모아서 집회를 했는데 거기서 그 목사가 한 설교가 박옥수 설교와 하나도 틀림이 없이 소름이 끼치도록 똑같더란다.

또 어떤 이들은 능력을 받기 위해 어느 목사가 하는 기도원 집회에 참석해서 그럴싸한 말에 빠져들었는데 급기야는 어느 능력 있는 집사의 안수를 받아야 능력을 받는다 하여 집사에게 안수를 받으면서 십만원씩을 내라고 하는데 돈이 없으면 카드로 또는 현금카드로 돈을 거두어들이는데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돈을 내고 집사에게 안수를 받는, 사마리아 시몬과 같이 돈을 주고 하나님의 은사를 사려고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일들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진주어딘가에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을 가르치며 율법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꽁꽁 묶어 두는 데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도 수천명의 목회자가 모인다고 한다. 어느 목사님이 귀뜸을 해주는데 "장로님 그곳에 목사님들이 혹하는 이유가 교인들을 그곳에 보내면 지옥 갈까봐 벌 받을까봐 목회자를 잘 섬기거든요." 어느 사모님이 귀뜸을 해 주는 말이 "거기는 섬기는 사람들이 다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어요. 율법의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 간다는 말을 수없이 해요"

그렇다면 예수전도협회만 좋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그렇게 가르친 적도 없다. 다만 예수전도협회가 그 동안 해온 일과 전한 말씀들은 이 단체 저 단체도 필요 없고 예수전도협회를 오라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주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주님 안에 거하면 전도가 저절로 되고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먹고사는 물질의 문제도 주님이 더해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을 쉬지 않고 전해 왔다. 그래서 경건생활을 해야 하고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사는 것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생활 그래서 주님께 인격적으로 가까이 가야만 주님의 권능과 능력이 나타남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말해왔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주님 안에 거할 때에 전도가 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반짝하는 순간에나마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것이 중단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주님 안에 거하기를 중단한 순간부터 다시 어려움에 빠져들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도자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사실 나는 집사가 아닐 때에도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의 말을 듣고 싶어서 8년 동안을 하루같이 통근버스 내 옆 좌석에 앉았던 직원이 있었고 휴게실에서 식당에서 또는 예비군훈련장에서 항상 내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나올 때에 의례 몇명의 직원들이 따라오는데 '왜 따라오느냐'고 물으면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서'라는 대답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온 목사님에게 호텔 커피숍에서 내가 구원을 받고 나를 쓰시는 주님의 사역에 대한 간증을 할 때에도 그 호텔 종업원들이 우리 테이블을 둘러 모이는 일들도 있었다.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첫 시간에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회개가 터지고 매주마다 그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면서 청년부가 부흥이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있었다. 이십 명의 청년들로 시작한 전도모임이 이년반 만에 300명의 훈련받은 전도자들로 부흥되었으며 KBS모임을 다섯명으로 시작을 했는데 오년만에 300명이 되었으며 그 모임을 통해 직원들도 변하고 탈렌트도 변하고 성우도 변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버리고 선교사로 나간 사람만 여섯명이며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많이 나왔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다. 이일은 주님이 하시는 주의 일이다. 하박국도 그렇게 말했다.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시켜 달라고, 이 일을 사람의 일이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부흥을 주실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골방이 필요하고 아라비아의 시간이 필요하다. 주님 안에 거하는 이유와 목적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버리는 회개가 일어남으로 거룩해진 우리의 심령 속에 권능의 원작자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그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 곧 전도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시간을 가졌는가? 성도의 교제 곧 영적교제가 있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가?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거룩함의 진보가 있고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을 따라가는 인격의 자취가 나타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사도바울이 안디옥에서 주님에게 쓰임을 받기까지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시간을 기점으로 하여 11년 이상의 세월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세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년의 각고의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깨닫고 다지는 데에 그와 같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이 전도자(복의 근원)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연단을 받았는가?

부족하지만 나에게도 아라비아의 시간이 있었고 내가 변하지 않는 것과 주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기에는 거룩함이 턱없이 부족한 것 때문에 하루도 빠짐이 없이 날마다 길에서 차안에서 울면서 다닌 세월이 십여성상을 헤아린다. 내 자아가 완전히 숨이 죽어서 사랑하는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트럭 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중심으로부터 감사함의 고백이 나갈 때까지 수많은 세월과 말씀으로 연단을 받는 세월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회사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무도 없는데서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르면서 울었던 것도 실상은 속마음으로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이 너무나 많이 있고 그런 것들이 잘 끊어지지도 버려지지도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울었던 적도 있었다. 십년이 넘도록 아침마다 통근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보다가 울고 찬송을 부르다가 울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보면서 울고 한국을 휩쓴 부흥의 불길이나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불타는 전도자 존성, 찰스피니의 생애 등등의 책을 보면서 울면서 다닌 이유가 날이가도 시간이 가도 여전히 주님과는 거리가 먼 내 인격때문에 울고 다녔다. 그리스도안에 거함이 일정치 않고 말이 행실이 일관성이 없고 받은바 은혜가 들쑥 날숙하며 골방에서 받은 은혜가 그은혜가 더 필요한 직장에서 나타나지 못하고 이내 잊어버리고 사라져버리는 안타까움에 울고 다닌 것이다.

그리고 뼈저리게 체험을 한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가 내 배에서 흘러 넘칠 때까지는 내게 생수가 필요하고 더 필요하고 또 마시고 더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서 마시다가도 쉽게 포기를 하고 이 우물 저 우물을 기웃거리기 때문에 생수가 그의 배에서 독자적으로 터져 나오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래서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아서 외형적으로는 목회자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영적인 내면의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도 실족을 하고 가족들에게도 실족을 시키며 교인들도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말이다. 그와 같은 일들이 다 변화되지 못한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더 힘주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을 구하지 말라. 사람을 찾지도 말라. 사람을 자랑하지도 말라. 여러가지 가증스러운 방법을 구하지도 말라 그것은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인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정해 놓은 목표에 하나님을 이용하지도 말라. 오직 나의 무능하고 초라한 모습을 주님 앞에 고백하라. 모든 문제가 나의 목마름에 있음을 곧 주님을 향한 목마름에 있음을 깨달으라. 그리고 옛사람들과 같이 철저한 자기부정가운데 들어가라. 모세처럼 나는 못한다고 부르짖으라.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하고 그 능력을 주시는 자 안으로 들어가라. 각근한 심령으로 들어가라. 그 동안 주님을 떠나 살았던 것을 원통히 여기고 애통함과 통곡함으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주님이 우리를 혹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혹시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지라도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를 받아주시지 않고 혹 나를 다시는 써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길 밖에는 없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다른 길이라는 것이 결국은 마귀의 속임수요 우리의 시간과 생명을 빼앗는 길이다. 주님 안으로 들어가자 주님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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